독서감상: 고두 (叩頭)

2017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대상 수상작품, 임현 작가의 ‘고두 (叩頭)’를 읽었다. 영문권에서 나온 단편에 익숙해진 나한테는 아주 생소롭게 서술자가 마치 독자한테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한테 이야기를 하는 듯한 문체로 서술되는 단편이었다. 한국어에선 첫문장부터 그런 식의 문체가 들어난다는 점을 참 좋아한다. 읽으면서 여러번 ‘아, 이 문장은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단편은 호불호가 좀 더 명확하게 갈리는 장르같다. 그리고 예를 들면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고 해서 출판되는 판타지 소설을 몽땅 다 읽는 것도 아닌 것처럼 단편애호가라고 해서 접하는 단편소설마다 감동에 빠지거나 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단편은 중편이나 장편소설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내에 독자를 사로잡아야하기 때문에 도입부부터 지루하면 강한 인상을 남기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고두 (叩頭)’는 처음부터 내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도입부에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길레 또 부자지간의 갈등에 대한 이야긴가 했는데 오히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고, 딱히 내용보다는 서술형, 그리고 서술자의 (직업이 선생님이다) 인간사상과 전혀 미안해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사죄받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것이 모순적으로 뒤엉켜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고 결과적으로는 이 단편 전체가 서술자의 인간사상의 교과서적인 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서술자의 인간사상은 대충 이렇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데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자기 시선이 기울어진 건 인정하려고도 안한다, 자기는 늘 옳다고 생각하면서 남을 다그친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사죄하는 것도, 이 세상의 불공평함에 열을 내는 것도 실은 다 자기 기분 좋으라고 하는 거면서 자신은 정의의 수호천사라도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한다. 그러니까 이런 점들을 윤리적인 삶에서 제일 경계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이 사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문제는 여기서 체념하고 그냥 마음대로 살 것 인가, 아니면 이 딜레마 앞에서 자기만의 길을 찾으려 노력할 것 인가, 타협을 할 것인가, 자책을 할 것인가, 즉 이 문제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것 아닌가 싶다.
나에게 있어 ‘고두 (叩頭)’의 매력은 서술자가 자신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이다,라는 변호를 들이대며 하는 행동이 결국은 자기가 윤리선생으로서 경계하라고 했던 그 짓을 그대로 하는 것이다. 서술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원하는 건 자신이 홀가분해지기 위해 용서를 비는 거 였으니까. ‘고두 (叩頭)’를 통해 임현 작가가 인간의 이러한 모순적인 가치관을, 사상과 실행이 늘 따로 노는 우리 인간들의 심리를 훈계적보다는 옆에서 자그시 꼬집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재밌는 점 두가지만 더. 이 단편에 나오는 이름은 딱 하나 밖에 없다. 연주.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하기엔 그녀의 삶과 성격이 얼마나 서술자에 의해서 뒤틀어졌는지 알 수 없는 등장인물. 어째서 연주만 이름을 갖고 있는 걸까. 그리고 보아하니 연주는 이름이지 성이 없는데 왜 이 단편에서 유일하게 성이 알려진 사람이 서술자일까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동료가 ‘김 선생’이라고 하는 것만 알려져 있으니까.). 두 사람이 얽혀서 생긴 이야기니까? 그러기엔 비중분배가 잘못되지 않았나?
마지막으로 한 번 짚어가고 싶은 것은 이 단편의 제목. ‘고두 (叩頭)’는 물론 서술자가 가르쳤던 ‘사죄포즈’. 연주가 자신의 가르침을 너무 훌륭하게 연기하는 바람에 자신의 삶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고 서술자는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기엔 나무랄데 없는 경례의 표시. 그렇지만 인간이 하는 행동이 다 그렇 듯 겉과 속은 자주 따로 논다. 21세기에서는 오히려 그 과장된 면이 속으로 상대방을 놀리고 있는 거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고두 (叩頭)’는 격식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는 것 같은 서술체와 대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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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예전에 나는 독서 하는 게 아주 간단했다. 그냥 집에 있는 책 중 한 권을 책장에서 끄집어내 읽기 시작하면 다였다. 초반부에 몰입이 잘 되지 않아도 집중해서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만약 정 몰입이 안 되면 읽고 있던 책을 다시 덮어 버리면 끝이었다.

어쩌면 나의 독서생활이 그렇게 순조로웠던 것에는 내가 그 당시에 읽던 책이 그만큼 소와하기 쉬운 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무렵에는 솔직히 내키는 책만 읽었고 (솔직히 이건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영어를 늘린다는 핑계아래 몇 시간 안에 해치울 수 있는 청소년 소설을 주로 즐겨 읽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이야기에 굶주려 있었고, 서양 (특히 미국) 문화에 큰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심지어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로도 나의 독서양은 줄지 않았고, 오히려 소설을 현실도피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고, 현신을 잊기 위해서 읽던 소설 속에서 나 자신을 찾으려고 하다가 나와 비슷한 사람은 주인공은커녕 조연급으로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갑자기 흥미가 뚝 떨어져 버렸다. 갑자기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습득하기보다는 그 책의 문제점 먼저 집어내게 되었다. 옛날부터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다는 게 무척 좋았었는데, 자꾸 밖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공감의 문이 닫혀버리면서 독서를 해도 도무지 즐겁지 않았다. 책을 읽기도 전에 작가의 출신지, 성별, 성적 정체성을 분석하고 있었고, 이 책이 과연 고전 혹은 현대문학 중에서 클래식에 속하는지 따지고 있었으며 책을 읽으면서도 캐릭터가 혹은 서술자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rrect, PC) 묘사를 하고 있는지 더 큰 신경을 썼다.

그렇게 특히 영문학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삐걱거리던 나의 독서생활은 올해 3월쯤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워낙 독일에서 유학하기 시작한 뒤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정체성이 급커브를 돌면서 내 뇌가 한동안 영어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 영문학도로서 여간 낭패가 아니다. 하지만 한창 사춘기 때 한국어가 그토록 싫었던 것처럼 갑자기 영어, 독일어에 거부 반응이 걸리면서 한 두 달 동안은 아무 독서도 하지 않게 되었다. 옛날에 매달 스무 권 넘게 책을 읽던 걸 생각하면 참 놀라운 진전이다. 솔직히 지난 3달 동안 읽은 책 12권 중 7권은 전공 혹은 부전공 과목을 위해 읽은 것이고, 나머지 다섯 권중 두 권은 한국어로 된 소설이었다 (에쿠니 카오리, 한강).

아직도 독서는 힘겹다. 별 생각 없이 술술 읽어 내려가는 독서 방법으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에는 소설 자체에 떨쳐버릴 수 없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기에. 그렇지만 앞으로도 천천히, 가끔은 고통스럽게 책을 읽어가게 될 것 같다.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그 무언가를 찾아가며. 그렇지만 기분전환으로서는 아직(?) 너무 버거운 과제이기 때문에 현실 도피로는 만화와 아니메의 힘을 빌려야겠다.

에쿠니 가오리

에쿠니 가오리(江國 香織) 의 책을 읽으면 과연 이 작가 책을 서양 언어로 번역 했을 때 잘 팔릴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지금 읽고 있는 책 (장미 비파 레몬 薔薇の木 枇杷の木 檸檬の木), 딱히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건 없고 오히려 십여명의 등장인물의 성격과 라이프스타일을 천천히 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 시장에도 (다른 나라는 잘 몰라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그런식의 소설 – ‘literary fiction’ – 이 있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장미 비파 레몬’과는 달리 집중과 끈기를 요구한다.

역시 동양에서 자란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걸까.

아니면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캐릭터의 속 깊이 안 들어가는걸까? 그렇지만 또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지금 동양국가에 사는 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주인공들을 보면 2000년대 한국 사회에 (16년 만에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충분히 있을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된다. 정은 있되 사랑 없는 부부생활과 어느 나라던 존제하는 짝사랑과 불륜, 아주 독립적인 여자와 연상의 보호와 애정을 바라는 여자까지, 실제로의 삶은 책이 그려낸 것 보다 물론 더 복잡하겠지만 (특히 시집 갈등이 없는 게 신기하다 – 일본은 좀 다른 문화인가?).

그런걸 다 떠나서 나는 책에서 우려나오는 그 편안함이 좋다. 영어의 ‘cozy’라는 표현에 그나마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은 그 포근함은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존제하지 않기 때문에 더 좋은 것 이다. 나는 성격이 워낙 전전긍긍하는 성격이라서 그런지, 혼자 할 일 없이 한 오후를 보내라고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만 만땅 받을 사람이다. 오후에 개와 산책을 하면서 가끔 꽃을 사서 들어가는 도우코나 이혼할 생각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꽃집을 운영하고 남편을 위해 요리하는 에미코의 삶은 내 불확신하고 1년 앞이 안 보이는 삶에 비해 더 안정적이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위안의 환상을 안겨준다.

도우코나 에미코 같은 사람들도 자기만의 전투가 분명히 있을텐데, 괴로워하고 절망하는 면이 있을 텐데, ‘장미 비파 레몬’에서 에쿠니 가오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 까지는 – 아직 다 읽지 않았으니까). 나는 나의 삶의 절반 이상을 그렇게 나 나름대로 힘들어 하면서 보냈기 때문에 (솔직히 요즘 시대에 그렇게 안 사는 사람이 어딨나) 내가 만약 글을 쓴다면 그런 모습을 담고 싶지만, 가끔은 이렇게 편안한 책을 읽으면서 영혼을 쉬게 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진정한 평화는 도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 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여기까지.